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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마지막 걸음,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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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2-05-17 조회수  2668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에서 내리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양화진은 어떤 곳?

양화진은 조선왕조에서 교통, 전략적 요충지로 사용된 곳이다. 서해로 들어오는 교역품이 양화진을 통해 도성과 궁궐, 전국으로 거래되었던 곳이나 동시에 외부세력의 잦은 침입으로 대원군 당시 군진이 설치되기도 했던 곳이다.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의 함대 3척이 양화진까지 침범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은 이 곳에서 천주교도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하였다. 양화진은 한양(서울)의 최대 요충지이자 동서 문화간 충돌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천천히’라는 표지판이 말해주는 듯 조용하고 소박한 담장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도착한다. 도착하자마자 큰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며 방문한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안내원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직접 자세한 설명을 해주는 가이드들이 있다. 이들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자원봉사자들이다. 먼저 그들은 안내 제공에 대한 의사를 질문한다. 그리고 대답에 긍정적으로 응하면 영상물을 통한 양화진을 비롯한 한국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초등학생, 중고등학생, 청장년층 각각을 위한 영상물이 준비되어있다. 영상을 감상한 후 자원 봉사자들로부터 각 묘지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특히 선교사들의 유가족을 비롯한 많은 외국인 방문객들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도록 외국어로 안내를 해 주는 자원 봉사자도 있다.


양화진은 조선이 서구 열강들과 외교를 할 때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서양인 의사 ‘알렌’의 뒤를 이어 ‘광혜원’을 운영하던 ‘헤론’은 치료를 하던 도중 조선인 환자가 가지고 있던 전염병에 옮아 죽게 되었다. 당시 외국인들의 묘지는 제물포가 유일이었다. 그러나 ‘헤론’이 죽음을 맞이할 때는 이미 한 여름이었기 때문에 시신을 제물포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 했다. 마침 조선은 영국에게 외국인 묘지를 제공할 것을 약속하는 조약을 맺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최혜국 조관을 근거로 조선에게 한성 근처 외국인 선교사 묘지를 설립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생기게 된 곳이 이곳,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다.
이 곳에는 한국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보인 417명의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안장되어 있다. 먼저 ‘베델’선교사는 ‘억눌린 한국 사람들의 대변인’이라 불릴 정도로 한국인을 위해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언론인이었던 ‘베델’은 <대한 매일 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통해 한국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했다.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는 인물이다. ‘육영공원’과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로 활동했다. 또한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전 미국 대통령에게 외교적인 도움을 호소하기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한편 ‘언더우드’는 ‘한국선교의 개척자’라고 불리는 인물로서 영한사전, 한영사전, 한국어문법서 등을 만들어 직접 출판했다. 여성 권리 보호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한 여자 선교사들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먼저 한국으로 들어 온 외국인 선교사 ‘켐벨’이다. ‘켐벨’은 ‘배화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또한 이화학당을 설립한 ‘스크랜턴’은 한국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의 역할을 한 인물이다. 버려진 아이들과 첩으로 생활하는 여자 아이들을 시작으로 여성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는 단 한 명의 일본인이 안장되어있다. 바로 ‘소다 가이치’이다. ‘소 다 가이치’는 방황시절에 그를 잡아준 한국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한국으로 건너와 고아들을 위해 힘쓴 인물이다. ‘소다 가이치’는 그의 부인과 함께 1921년부터 45년까지 천명 이상의 고아들을 돌 보았다. 이런 활동을 바탕으로 ‘소다 가이치’는 한국 정부로부터 첫 문화훈장을 받은 일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베델, 헐버트,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 외에도 무어, 벙커와 같은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들이 안장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묘원 바로 옆에는 공원이 있어 방문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묘지’라는 말이 갖는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아닌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의 장소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다.


함께 둘러보면 더 좋은 곳 <절두산순교성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이 신교의 성지라면, 절두산순교성지는 구교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절두산순교성지는 병인박해 당시 수천명의 신자들이 말 그대로 절두, 머리를 잘린 곳이다. 천주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절두산 순교 박물관’과 우리나라 최초의 대주교인 노기남 대주교를 기념하는 ‘노기남 대주교 기념관’ 등이 세워져 있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자국에서 누릴 수 있었던 수많은 권리를 포기하고 도움의 손길을 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를 보면서 한국역사를 되새기고 그들의 노고를 회상할 수 있다.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지난 과거를 존중하는 자세는 세계와 소통하는 이 시대에 요구된다. 이에 발맞추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관심을 가지고 보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코리아브랜드넷 3기 콘텐츠 기자단

리포터 황유진, 팽성우
이메일 dbwls720@naver.com
qnfaudtlswjs@naver.com

최초등록일 2012.05.17, 최종수정일 2012.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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